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알 아문센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 === 1872년 7월 16일, [[오슬로]] [[피오르드]] 초입인 보르게 지역의 톰타에 있는 오두막에서 태어났다. 로알 아문센은 옌스 아문센의 막내아들이었다. 막내아들인 아문센은 세 형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고, 가족 소유의 조선소에서 인부 및 선원들과 친하게 지냈다. 어린 시절에 로알 아문센은 수공업자가 되고 싶어 해서 일터를 마치 본인 집 안방 마냥 자주 드나들었으며, 조선소 인부 중 하나인 늙은이 올센에게 수공업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. 올센은 아문센에게 머리와 손 중에서는 머리가 더 쓸모 있는 것이고, 중요한 것은 손과 머리를 다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. 아문센의 가족은 훗날 오늘날의 [[오슬로]]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주하였고, 아문센의 아버지는 정치에 입문하여 왕실 관리가 되었다. 아문센은 9세에 [[김나지움]]으로 진학했으나, 평소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성격이었는지라 학교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. 14살 때이던 1886년, [[영국]]과 [[노르웨이]]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던 아버지가 사망했다. 로알의 형들은 집을 떠나 독립하여 각각 상인과 선원으로 일을 하였고, 로알은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. 1887년, [[영국 해군]] [[존 프랭클린]] 경의 탐험 보고를 손에 넣고 탐험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. 프랭클린 [[제독]]은 [[캐나다]]의 빙해 연안을 연구했고, 세 번째 북서 항로 횡단을 시도하다가 사망한 인물이다. 아문센은 그의 기록을 보고 "이상하기도 하다. 그와 그의 대원들이 참아내야만 했던 고통을 묘사해놓은 부분이, 바로 그 부분이 나를 사로잡아 버리다니."라고 회상했다. 프랭클린 제독의 일대기는 15살 소년 아문센을 사로잡았으며, "그의 일대기를 읽었을 때, 내가 느낀 열광적인 흥분은 나의 생애에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."고 언급했다. 하지만 제독에 대한 존경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의 계획에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. 1889년에 [[그린란드]]를 탐험하고 돌아온 [[노르웨이]] 탐험가 [[프리드쇼프 난센]](Fridtjof Nansen)이 귀향하는 것을 보았다. 아문센은 평생 동안 난센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다. 1890년에는 [[고등학교]]를 졸업했고, 오슬로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. 아문센의 어머니가 그가 평소에 [[의사]]가 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. 그는 어릴 적부터 탐험가가 되고 싶어했지만, 본격적으로 탐험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이다. 이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위험한 탐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. 1893년에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[[폐렴]]으로 사망하면서 아문센은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했다. 물론 비록 배우다 말기는 했지만 이 때 얻은 의학 지식은 그의 탐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. 스무살이 되자 아문센은 [[노르웨이 해군]]에 [[수병]]으로 [[입대]]했는데, 아문센의 [[징병신체검사]]를 맡았던 [[해군]] [[군의관]]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[[스키]]와 [[축구]]로 단련한 아문센의 신체적 강인함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. 심지어 다른 [[장교]]들을 불러서 구경하게 했을 정도였는데, 너무 감탄한 나머지 이들은 아문센이 [[근시]]라는 것은 간과하고 합격 처리해 버렸다.[* 아문센은 탐험 준비의 일환으로 입대하기를 원했으나, 상술하다시피 심한 근시라서 입대를 실패할까봐 걱정했다.] 그리고 아문센은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[[병장|수병장]]으로 [[제대]]했다. 아문센은 해군 시절에 1891년에서 1892년까지 [[미합중국 해군]]의 [[로버트 피어리]] 제독과 함께 북그린란드를 횡단했던 에이빈 아스트루프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